효월의 종언 못다 한 이야기

「어느 여행자의 궤적」

하늘 끝에서 울려 퍼지던 종언의 노래가 멎었다. 그 놀랍고도 기쁜 사태를 맞아, 신역 옴팔로스에 열두 신이 한자리에 모였다. 별의 미래를 둘러싸고 많은 의견이 오갔지만, 어쩌면 마지막이 될 신들의 회합을 마무리 지은 것은 그 의장 역할을 맡았던 남매신이 여행신 오쉬온에게 건넨 말이었다. “이 여행이 너에겐 마지막 여행이 되겠구나. 부디 멋진 운명이 기다리고 있길 바랄게.” 별의 신 니메이아가 별빛처럼 다정한 미소로 말하자, 시간의 신 알디크가 소원을 담아 말을 이었다. “우리의 숙원을 위해, 그 모험가를 옴팔로스로 데려와 주게.” 여행신 오쉬온은 묵묵히, 그러나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신들도 저마다 벅찬 심정이었다. 지식신 살리아크는 인간들의 역사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동시에 그 시간들을 잃지 않기 위해 힘껏 싸웠던 자들이 진심으로 자랑스러웠고, 태양신 아제마는 베네스의 소망이 이루어졌다는 희열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전쟁신 할로네와 달의 신 메느피나는 마도선이 하늘 끝을 향해 날아올랐던 그날, 무운과 무사를 빌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신들은 자신의 앞날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이 별에 사는,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모든 ‘인간’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풍요로워지도록, 지금까지 그들의 기도를 통해 자신들에게 축적된 힘을 ‘축복’으로 세상에 되돌려주고 싶다. 그리고 기구로서 창조된 자신들의 핵――베네스와 같은 뜻을 품었던 자들이 바친 영혼의 단편――을 별바다로 돌려보내고, 다음 생에는 인간이 되어 인간의 곁에서 살아가고 싶다. 이 소원들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인간 아이들과 전력으로 싸워 쓰러져야만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종말을 피한 지금이 바로 행동으로 옮길 때라고, 그들은 결론을 내렸다. 이미 제작의 신 비레고와 파괴신 랄거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싸움터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생각 중이었다. 한편, 해신 리믈렌은 자신을 특히 숭배하는 바다의 도시 주민들의 활기찬 모습을 다시 한번 눈에 담아두고 싶다며 바닷새로 변해 날아갔다. 그리고 계획의 중심이 될 ‘그 모험가’를 이끌 자로 지명된 여행신 오쉬온은, 데릭이라는 이름의 인간으로 변신해 조용히 옴팔로스를 떠났다. 산악을 관장하는 오쉬온이 산의 신이 아니라 여행의 신이라 불린 것은 인간 세상을 누비며 인간의 고독을 함께한다는 역할 때문이었다. 신역에 머무르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현세에서 보내온 그에게는, 한 가지 중요시하는 규칙이 있었다. 현세에 강림할 때는 반드시 신역으로 들어갔을 때와 같은 장소…… 즉 여행자로서 마지막으로 위치했던 장소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별에서 에테라이트를 사용하는 모험가들과 좀 다른, 신출귀몰하고 기이한 여행자라는 소문이 따라붙을 테니까. 그는 아무도 모르게 검은장막 숲으로 순간이동해, 소근소근 덤불 한구석에 살짝 내려섰다. 갑자기 나타난 데릭을 보고 주변에 있던 마물들이 놀라 달아났지만, 다른 목격자는 없었다. 이제 한숨을 좀 돌리고…… 여느 여행자가 잠시간의 휴식을 끝낸 것처럼 발걸음을 떼면 된다. 쾌청한 오후,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에 바람을 느끼며 걷다 보니 소근소근 덤불과 오리나무 샘을 가르는 술렁이는 강이 보인다. 옴팔로스 회합에 소집되기 직전, 데릭은 여행자 신분으로 숲언덕 공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변방의 작은 마을이지만 모험가들이 자주 찾는 모양인지, 홀연히 나타난 그를 아무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아 며칠간 유유자적한 나날을 보냈다. 덕분에 근방의 경비를 서던 귀곡부대 대원과도 친해졌고, 다리를 건널 때 마주치던 보초병은 가면 아래로 살짝 미소를 건네며 배웅해 주었다. 데릭은 지는 해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숲속 샛길을 걸으며 앞으로의 여정을 검토했다. 이대로 검은장막 숲 북쪽으로 빠져나가면, 커르다스를 경유해 모르도나로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곳에 조사지를 마련한 ‘성 코이나크 재단’의 연구자를 찾아 탐험가인 척 접근한 뒤…… 환상영역의 입구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꺼내면 된다. “……생각보다 짧은 여행이 될 것 같군.” 그렇게 툭 내뱉고 나니, 데릭은 자신이 마지막 여행을 아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모험가’가 경계하지 않고 의뢰를 받게 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연출해야 했다. 그러나 일개 여행자인 데릭이 해산했다고 발표된 ‘새벽의 혈맹’에 기댔다간 수상하게 볼 테고, 본인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은 당치도 않다. 실력에 걸맞게 감이 좋은 만큼, 어차피 같이 다니다 보면 언젠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릴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초면부터 의심을 사는 건 피하고 싶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새벽과도 관계가 깊은 ‘발데시온 위원회’로 의뢰가 들어갈 만한 이야기를, 샬레이안 관련 연구 기관으로 가져가는 게 가장 확실하고 자연스럽다. 그것이 지식신 살리아크와 상업의 신 날달이 끌어낸 답이었다. 데릭은 그 계획에 따라 모르도나로 향하고 있었으나, 목적지가 좀 더 먼 곳이었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그가 걷고 있는 길 하나만 보아도, 많은 사람의 발길로 흙이 다져진 것이다. 이 별은 이처럼 인간의 역사가 몇 겹이나 층층이 쌓여 있다. 별바다로 돌아가 녹으며 다른 영혼과 섞이고, 언젠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열두 신으로서 그 흐름에 합류하길 바라면서도, 천성이 여행자이기도 한 그는 조금만 더 데릭으로서 여행을 이어가며 인간의 삶의 궤적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 사이, 물에 뜬 마을 ‘가을박 마을’에 도착했다. 숲속 나무들을 베지 않도록 가을박 호수 위에 지어진 이 마을은 고급스러운 숙박시설로 유명하며, 주민들도 방문객에게 친절한 곳이다. 커르다스로 향하는 여행자나 상인이 휴양하기 안성맞춤인 곳으로, 광장에는 모험가 같은 행색의 사람들도 보였다. 느긋하면서도 활기가 넘치는 마을의 모습에 데릭은 빙긋 웃었다. 그들을 방해하지 않으려 에테라이트 옆을 빠져나가려 하자, 벤치에 앉아 쉬고 있던 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여행자 형씨, 혹시 이 시간에 출발하려는 거야? 날도 저물어서 위험한데, 저기 있는 둥둥 뜬 코르크 여관에서 묵고 가지 그래?” 아마 이 마을의 주민인 듯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 하늘에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친절에서 우러나온 말에, 데릭은 감사를 표했다. “아…… 신경 써 줘서 고마워. 하지만 서둘러 가야 해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다가 노숙할 생각이야.” 실제로 데릭은 가능한 한 빨리 ‘그 모험가’와 접촉해야 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묵느라 숙박할 수 없게 되는 사람이 생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인간의 숭배를 받는 에오르제아 열두 신이라는 자가, 무엇보다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을 우선시하는 건 자명한 이치였다. 친절한 주민은 데릭의 발치를 힐끗 보더니, 더 할 말이 있는 듯한 눈치였지만…… 데릭은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남기곤 그곳을 떠났다. 가을박 마을을 나서자, 풍경이 확연히 바뀌었다. 한때 큰 나무가 무성했던 깊은 숲이었으나, 제7재해 때 달의 위성 달라가브의 파편이 떨어진 탓에 지금은 거의 초토화되어, 남은 건 드러난 지층과 그곳에서 뻗어 나온 거대한 뿌리뿐이다. 그럼에도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거리는 계속 정비 중이었고, 보초까지 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갈라진 대지의 틈새에서 광맥을 찾아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까지 모여드는 판국이다. 정말이지, 이 별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참 씩씩하다. 아직 어스름할 때 커르다스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데릭이 발걸음을 서두르던 그때였다. “저기, 데릭. 당신이 검은장막 숲에서 나가기 전에 할 말이 있어.” 갑작스러운 부름에 뒤돌아보자, 그곳에는 이동성 식물의 유체, 즉 임시 육체에 빙의한 모습의 대지신 노피카가 있었다. 공중에 둥둥 뜬 그녀는 손처럼 생긴 덩굴을 솜씨 좋게 턱에 괴고 있다. “네가 먼저 말을 걸다니 별일이네…… 무슨 일이지?” “보아하니 정말로 모르나 보네. 발밑을 한번 봐.” 그 말에 발치로 시선을 돌린 데릭의 눈에 어린 오포오포가 들어왔다. 오포오포는 가늘게 떨면서도 그의 옷자락을 붙잡는다. 그리고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우컁…… 하고 작게 울었다. “뭐야…… 너, 언제부터……?” “당신이 가을박 마을에 들어갔을 때 이미 발밑에 붙어 있었어. 마물한테 공격받아 다친 데다 외톨이가 되어 버려서…… 숲을 걷던 당신을 따라왔대.” 숲의 도시 주민들의 숭배를 받는 그녀이니, 계획이 움직일 때까지 검은장막 숲에서 지내고자 찾아와 자초지종을 지켜봐 왔겠지. 말 못 하는 오포오포를 대변하고 나더니, 대지신 노피카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길래…… 이대로 커르다스에 들어가면 큰일 날 것 같아서 불렀어. 내 용건은 이게 다야. 이만 갈게.” 그 말을 끝내자마자 그녀는 반짝이는 빛의 구슬이 되어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데릭이 난처한 얼굴로 오포오포를 바라보자, 오포오포 또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커다란 눈망울은 이 사람이 자신을 해칠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부모를 잃고 무리에서도 떨어졌으니, 숲에서는 절대 살아갈 수 없겠지. 무엇보다, 억지로 떼어냈다간 이 믿음을 저버리는 셈이다. 그렇다면 인간으로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자. 그렇게 결심한 데릭은 가까운 불빛을 의지해 걷기 시작했다. 이 길 너머에 국경을 지키는 귀곡부대 감시초소가 있을 것이다. 오포오포도 필사적으로 그를 따라왔다. 그리고 데릭은 감시초소의 귀곡부대원에게 말을 걸었다. “미안하지만 여행자인데, 잠시 모닥불을 쬐어도 괜찮을까? 이 녀석이 다친 것 같은데, 잘 보이지가 않아서.” 귀곡부대원은 흔쾌히 그러라 허락했고, 데릭은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모닥불 옆에 앉아 오포오포를 안아 들고 다친 듯한 발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과연, 윗다리 쪽에 상처가 보인다. 야생 동물은 상처를 입어도 포식자에게 빈틈을 보여선 안 되기 때문에 태연스레 움직이긴 하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꽤 아팠을 것이다. 데릭은 배낭에서 연고를 꺼냈다. 이 연고는 예전에, 여행을 하기엔 옷차림이 너무 가벼운 데릭을 염려한 어느 상인이 준 것이다. 마지막으로 쓸 일이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연고를 발라주니, 오포오포는 안심한 듯이 데릭의 무릎 위에 자리를 잡았다. “잘 따르는걸. 다친 일행이 있다면 고개를 넘는 건 신중히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여기서 밤을 새우며 여행 이야기를 풀어도 좋고, 가을박 마을로 돌아가는 것도 방법이겠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귀곡부대원이 제안했다. 데릭은 그 말에 고민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날은 완전히 저물어,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대로 커르다스행을 강행했다간,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친 오포오포의 체력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순순히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야간 경비를 서는 보초들의 호의에 대한 보답으로, 사막도시에서 주워들은, 사건해결사란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나 하나 풀어볼까. 아니면 해방된 알라미고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가 좋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자니 옛날, 먼 옛날 여행지에서 만난 한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의 조각이 되살아났다. 그 사람은 각지에서 해결해야 할 온갖 문제를 찾아다니면서도, 미지의 땅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즐거움에 대해 일렁이는 불을 바라보며 이야기했었다. 데릭은 과거를, 지금을, 그리고 앞으로 만날 미래를 생각했다. 별과 인간을 사랑한 그 사람은, 뜻을 같이한 동지들은, 그녀의 마음을 이어받은 ‘그 모험가’는…… 마지막 여행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즐기고 싶다는 내 어리광을, 웃으며 허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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